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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 학파의 쾌락주의

인간이 쾌락을 좋아하고 고통을 싫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경험적 사실에 근거하여 에프쿠로스 학파는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제거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에피쿠로스 학파가 추구하는 쾌락은 무분별한 욕구 충족에서 오는 쾌락이 아니고, 사치스러운 향락에서 오는 쾌락도 아니다. 이런 쾌락은 순간적이고, 고통을 남길 수 있으므로 억제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쾌락에 탐닉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쾌락으로부터 멀어지는 쾌락의 역설을 초래한다. 에피쿠로스 학파가 중시하는 쾌락은 몸에 고통이 없고 마음에 불안이 없는 평온함이다. 이러한 상태를 평정심, 즉 아타락시아라고 한다. 이처럼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기 보다는 고통과 불안이 없는 상태를 추구하는데, 이런 점에서 그들의 쾌락주의를 소극적 쾌락주의라고 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 학파에 따르면 쾌락은 행복한 삶을 이루는 시작이자 끝이며, 다른 모든 가치를 평가하는 최고선이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참된 쾌락을 누리려면 우선 고통과 불안의 원인을 알아야 한다고 본다. 이들에 따르면, 고통과 불안은 우리가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욕구를 충적하지 못하거나,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를 충족하려는 데에서 나온다. 예를 들어 음식이나 수면에 대한 욕구처럼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욕구는 충족하지 못하면 고통이 일어난다. 그러나 사치, 부나 명예, 권력에 대한 욕구처럼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는 충족하지 못하여도 고통이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욕구를 충족하려는 노력이 고통을 초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참된 쾌락을 누리려면 필수적이지 않은 헛된 욕구를 자제하고,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욕구를 최소한으로 충족하는 소박한 삶을 살아야 한다. 다음으로 에피쿠로스 학파는 대중과 속세에서 벗아날 것을 주장한다.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공적인 삶은 집착, 좌절, 다툼, 분노 등을 불러일으켜 육체적 · 정신적 고통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피쿠로스 학파는 가까운 친구와 함께 은둔 생활을 하며 우정을 나누고 정의롭게 살 것을 강조한다. 이때 우정은 서로 지적인 즐거움을 나누며 행복하게 살기 위해 중요하고, 정의는 인간관계에서 서로 피해를 주지도 받지도 않기 위해 필요하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죽음, 운명, 신에 대한 잘못된 믿음을 제거하면 마음의 불안이 없어지고 평온함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죽음은 모든 감각의 상실을 의미하므로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또한 필연적인 운명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운명 때문에 불안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리고 그 자체로 완전하고 부족함이 없으며 행복한 존재인 신은 인간에게 호의나 악의를 품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따라서 신의 저주를 받을까 두려워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에피쿠로스 학파 윤리 사상의 한계와 영향

에피쿠로스 학파의 쾌락주의는 공적인 삶을 벗어난 은둔 생활을 강조하는 점에서 지나친 개인주의적 측면을 지닌다는 한계가 있다. 또한 쾌락이 좋은 것이지만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나 최고선과 동일시될 수 있는지에 의문이 제기된다. 그래서 쾌락을 최고선으로 본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쾌락주의는 사치와 향락을 추구한다고 잘못 이해되어 중세를 거치면서 철저히 배척받았다. 그러나 에피쿠로스 학파의 쾌락주의는 르네상스와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재조명되어 근대 윤리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근대 경험론은 에피쿠로스 학파가 경험을 중시한 점을 이어받았고, 공리주의는 쾌락을 행복으로 보는 관점을 계승하였다. 특히 질적 공리주의는 쾌락의 선별적 추구와 평정심을 강조하는 견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