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한국 전통 윤리 사상의근대적 지향성

유교 사상의 근대적 전개

17세기 후반에 들어와 성리학의 한계를 비판하며 사회와 삶의 실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새로운 학문적 경향인 실학이 대두하였다. 실학은 백성의 삶과 직결되는 사회 제도를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고,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서양의 학문과 사상도 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새로운 학문 방법론에도 관심을 기울여 다양한 분야의 학식을 소개하는 백과사전식 방법론, 옛 문헌에서 확실한 증거를 찾아 실증적으로 경서를 설명하려는 고증학적 방법론 등을 수용하였다. 이러한 실학의 특징은 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사구시로 요약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한국 유교 윤리 사상은 다양한 학문적 경향이 공종 하였는데, 그중 주목할 만한 것은 정제두와 강화 학파로 대표되는 양명학적 학풍의 등장이다. 정제두는 성리학에 치우친 사상적 분위기 속에서도 왕수인의 주장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사상을 수립하였다. 이처럼 그는 인간을 도덕적 주체로 여겨 철저하게 내면에 충실하고 참된 자아를 각성할 것과 생활 속에서 도덕을 실천할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강화 학파는 양명학을 뿌리로 하면서도 불교, 도교 등 다른 사상에도 관심을 가지는 개방적인 학문 탐구 태도를 보였다.

 

외세의 침투와 한국 전통 윤리 사상의 대응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서구 세력의 침투와 서양 문물의 유입은 전통 사회의 기반을 흔들어 놓았고, 전통적인 가치관에도 위협을 가하였다. 이항로를 비롯해 위정척사를 주장한 학자는 서양 사상과 문물이 유교 윤리를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이들은 내적으로는 군주와 집권 관료층의 수양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외적으로는 서양의 사상과 문물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척양 · 척왜를 주장하였다. 또한 통상 압력을 가해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는 외세의 정치적 · 경제적 침략 의도를 파악하여 상소 운동을 벌였고, 반외세 민족주의 성격을 갖추고 의병 활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위정척사와 달리 서양의 사상과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개화사상도 대두하였다. 개혁의 방법에서 볼 때, 개화사상은 절대 군주제를 개혁하고 새로운 정부를 정부를 구성할 것을 주장하는 급진적 경향과 유교의 질서를 지키면서 서양의 우수한 과학 문명을 받아들이자는 경향으로 구분된다. 일제에게 국권을 침탈당한 이후 개화사상은 국권 회복과 실력 양성을 추진하는 애국 계몽 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우리의 고유 사상을 바탕으로 유교와는 다른 주장을 담은 신흥 종교도 등장하였다. 대표적으로 동학, 증산교, 원불교 등을 들 수 있다. 최제우가 제창한 동학은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라는 기치를 내걸면서 출발하였고, 백성에게  '새로운 사상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희망을 심어 주었다. 특히 "사람은 모두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 "사람을 하늘처럼 섬겨라.",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동학의 가르침은 인간 존엄 사상과 평등 의식을 고취하였다. 강일순이 제창한 증산교는 세상이 잘못되는 까닭은 신분 · 남녀 차별 등으로 수모와 박해를 받은 사람들의 원한이 쌓였기 때문이라고 보고, "원한을 풀어 버리고 함께 살아가자."라고 주장한다. 박중빈이 제창한 원불교는 세상의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정신의 개벽을 주장하며 생활 속에서 보은, 평등, 자비 실천을 강조한다. 신흥 종교는 우리의 고유 사상을 바탕으로 유·불·도 사상을 비판적으로 계승하였다. 또한 집권 관료층이 아니라 농민을 비롯한 백성의 요구를 담고자 하였고, 당시의 혼란과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제안하며 많은 사람의 호응을 얻었다.

 

한국 전통 윤리 사상의 의의

실학의 개혁 정책이 현실에 적용되는 일은 드물었고, 실학에서 내놓은 주장 역시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백성이 살기 좋은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사상적 모색과 실제를 중시하는 학문 태도에서 근대 지향적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강화 학파는 지역과 가학의 전통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지만, 성리학 일변도의 사상적 흐름 속에서도 독창적이고 특색 있는 주장을 펼쳐 사상의 다양화를 이끌었다. 위정척사는 국제적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여 보수적 · 배타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하지만 외세의 침략 의도를 간파하고 목숨을 버려서라도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의리 정신은 자존 의식을 공고히 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개화사상은 서구 열강의 침략성을 간과하고, 그들의 문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바로 자강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소홀히 여겼다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여러 분야에서 실력을 양성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는 것은 민족의 생존에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신흥 종교는 종교 운동을 중심으로 사회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였으므로 사회 구조 개혁의 성취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한 면이 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교리를 연결하였고, 외세의 침탈에 맞서 우리의 자존과 독립을 실현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